나의 이야기

미국이 ‘0대 18’을 견뎌

또랑i 2018. 12. 19. 17:10

비건, 최선희 만남 0회, 이도훈 18회
우리는 ‘북만 본다’, 미는 ‘원칙을 본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인으로부터 요즘 입시철 서울에서 회자한다는 우스개를 들었다. 질문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부법은?”. 답은 “Book만 본다”란다. 그런데 책을 열심히 탐독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한다. “‘북(北)’만 열심히 챙긴다”라는 뜻이란다. 경제나 청와대 기강이 바닥에 쓰러져 가도 오직 북한 바라기에 몰두한다는, 뼈를 담은 풍자일 게다. 하기야 미국 조야에선 한국은 북한의 변호사나 홍보회사처럼 행동하고 있다(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15일 VOA 대담)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판이니 우스개로만 흘려들을 수도 없다. 
  
올 연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뜨거운 가슴’으로 서울 답방을 호소한 문 대통령의 러브콜을 ‘차가운 머리’로 차버렸다. 크게 얻을 게 없었기 때문일 게다. 만약 김 위원장이 서울을 답방했으면 지금쯤 우리 사회는 또 한바탕 들뜨고 분열됐을 것이다. 일자리 절벽이나 규제개혁 등 ‘남(南)’의 진짜 이슈는 파묻혔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17일 취임 19개월 만에 열었다는 ‘첫’ 확대경제장관회의도 없었을지 모른다. 김 위원장에게 고마운 생각이 든 건 나뿐만은 아닐 게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왼쪽)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간 회담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왼쪽)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간 회담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실 진짜 목을 길게 빼고 북한을 바라보는 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인 비건일 게다. 임명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북한 측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찾아가도,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도 감감무소식이다. 그런 비건이 오늘 서울을 찾는다. 우리 측 카운터파트인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는 무려 18번째 만남이다. 0대 18.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다. 대북한 협상대표인지, 대한국 협상대표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도훈(오른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외교부 청사에서 면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도훈(오른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외교부 청사에서 면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트럼프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동맹의 근간이 돼 왔던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도발적인 전쟁 게임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북한이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 반복했던 이야기다. 그걸 미국 대통령이 말했다. 한·미 정부가 수습에 나섰지만 김정은 머릿속엔 우리를 이해해 줄(혹은 속이기 쉬운) 협상 파트너는 트럼프밖에 없다란 믿음이 각인됐다. 2차 정상회담 전 번거롭게 비건 같은 ‘원칙주의자’들과 대표급 회담을 해 봐야 태클만 들어올 게 뻔하다고 본다. 담판주의자트럼프와의 직거래를 갈망하는 이유다. 노벨 평화상을 노리는 트럼프도 내심 담판을 원한다. 위대한 협상가는 자신 한 명으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건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8월 23일 스티브 비건 포드 부회장(왼쪽)을 미 국무부 대북정책대표에 임명하고 있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EPA=연합뉴스]

지난 8월 23일 스티브 비건 포드 부회장(왼쪽)을 미 국무부 대북정책대표에 임명하고 있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EPA=연합뉴스]

  


하지만 대통령 한 명의 생각 때문에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는 게 미국의 진짜 힘이다. 대통령이 서두른다고, 상대방(북한)이 튕긴다고, 비핵화 전 제재완화 금지’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란 원칙을 굽히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만 본다는 우리와 달리 미국은 원칙을 본다. 18대 0의 비정상을 견뎌내는 힘이다. 북한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인 이유다. 아마 북한은 이를 못 읽고 실기(失機)했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 소련과 협상할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고 했다. 하지만 북한 문제를 다루는 미국의 지금 기류는 다르다. 믿지 마라. 그러니 검증하라(Dont trust therefore verify)(갈루치 전 특사)다. 엄연히 다르다. 이 흐름은 당분간 우리로서도 어떻게 바꿀 수 없을 것이다. 2019년 우리의 대미·대북 정책에 새롭게 반영해야 할 대전제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출처: 중앙일보] [김현기의 시시각각] 미국이 ‘0대 18’을 견뎌내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