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카무니'를 중국어(한자어)로 음역한 것으로, 샤카는 그가 속하던 부족, 무니는 '성자'를 의미하므로 석가모니란 '샤카(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무니에는 고행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석존, 불, 여래 등의 10가지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칭한다. 또한 붓다(부처)로도 불린다.
본명은 싯다르타 고타마로, 샤캬족의 소왕국인 카필라에서 '라자' 슈도다나와 마야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석가모니는 인도인이라고 많이 알려져있는데 확실하게 인도사람이라고 단정 지을수는 없다. 석가모니의 탄생지로 유명한 룸비니가 네팔 남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불가촉천민을 포함해서 5단계로 계급을 나누고, 전생에 업(카르마)를 져서 현세에 이런 걸로 태어난 것이라는 사상을 주장한다. 그러니 내가 현생에 그 계급에 맞는 일을 열심히 하면 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는 지금 계급이 아닌 더 높은 계급으로 환생한다든지 바라문으로 환생할 수가 있다고 가르쳤다. 인도의 지배층은 이 힌두교의 가르침을 널리 설파해 하위계급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고 현대에도 이러한 문화는 인도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카스트 제도를 강력히 반대하고 현세의 계급에 상관없이 수행을 함으로써 여성이나 천민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었다. 이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일부 권력자들의 열성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아쇼카왕 이후의 인도에서는 타 종교의 요소들을 받아들인 힌두교가 세를 급격히 불려 민중들을 적극 공략해 인도의 사상의 대세를 점하게 된다.
석가모니의 아버지 정반왕의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다 출가했기 때문에 정반왕 사후 샤카족은 부처님 당대에 인접한 강국 코살라국의 침공으로 멸망하나, 한편으론 출가한 샤카족이 있었기에 샤카족이 사라지는 건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전대에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비도다바 왕자의 아버지 파세나디 왕이 샤카족에게 사돈을 맺자고 여자를 보내달라고 하자, 코살라국이 힘만 센 야만스런 나라라고 경멸하던 샤카족은 비천한 출신의 여자를 왕족이라고 속이고 시집보냈다.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비도다바인 것. 비도다바가 아직 왕자일 적에 샤카족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뒤에서 모친 얘기를 꺼내며 몰래 비웃는 것을 듣고는 앙심을 품었다. 결국 왕위에 오른 뒤에 샤카족을 침공했다. 이 때 석가모니는 3번에 걸쳐 군대 앞을 가로막아 설득하여 군대를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다시 군대를 보내자 4번째는 결국 치뤄야하는 업이라는 것을 알고 슬퍼하면서도 막지 않았다. 여담으로 비도다바도 얼마 뒤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 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코살라국이 샤카족을 학살하자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석가모니의 사촌 뻘이었다고 함)는 코살라국의 왕에게 '내가 저 호수에 들어가 있는 동안이라도 학살을 멈춰달라'라고 간청했다.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오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마하나마가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들어가 보게 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호수 바닥에 자신의 몸을 묶어 둔 채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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