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열렬한 친한파였던 러시아 극동문제연구소(ИДВ)의 미하일 티타렌코(78) 소장은 냉소적으로 변했다. 1985년부터 27년째 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 소련의 국교 수립 과정에도 관여했던 인물의 이런 진단은 러시아에서 한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다.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가 지난 6일 모스크바 극동문제연구소에서 티타렌코 소장과 두 시간에 걸쳐 논쟁적 대담을 가졌다.
-러시아는 중국에 한반도 문제를 맡기고 2선으로 물러난 인상이다.
“한국이 러시아의 우선순위에서 2선으로 밀렸다. 전엔 1순위였다. 큰 기대를 걸었지만 여러 경험을 통해 환상이었음을 알게 됐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나 극동 개발에서 한국이 결정적 역할을 못한다고 본다. 잠재력에 문제가 있거나 한국의 ‘배후에 있는 존재’ 때문이거나 시베리아 자체에 흥미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 한국은 시베리아에 관심이 있다지만 투자가 없다.”
-누가 배후에 있단 말인가.
“그걸 모르나(웃음). 미국은 한국·일본의 대(對)러 관계가 좋아지는 걸 싫어한다. 그렇게 되면 두 나라에 미군이 주둔할 정당성이 떨어지지 않나.”
-우리도 국가 이익을 추구한다. 늘 미국 말을 듣는 건 아니다.
“늘 그러진 않겠지만 자주 그러지 않나.”
-한국도 시베리아 개발과 투자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투자가 없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북한을 어떻게 보나.
“변덕스럽고 합의도 안 지키는 북한 지도부에 진절머리를 낸다. 한국에 또 불만이 있다. 소련이 88년 서울올림픽 때 북한의 방해를 막으려 얼마나 돈과 머리를 쓴 줄 아는가. 개최 전엔 KGB 국장이 평양에서 김일성·김정일을 만나 압박했다. 이젠 그런 레버리지를 더 이상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른 할 일도 많다. 러시아 지도부는 북한 환상도 없고 북한 지도자를 접촉하거나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북한을 1순위로 삼는 중국이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한·러가 같이 북한 핵을 해결하면 좋지 않나.
“핵 문제는 한국과 미국이 도발했다. 극동문제연구소는 20년 전 미국과 관련 국가가 남북한을 교차승인하는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소련과 중국이 한국을 인정했다. 그런데 미국이 북한을 인정했나. 소련은 한국의 유엔 가입에도 노력했다. 그게 쉬웠을 것 같은가. 한국은 김일성을 낮춰보는데 그는 루스벨트·처칠·마오쩌둥 같은 큰 전략가다. 김일성은 미국과 남한이 북한을 붕괴시키려 한다고 봤다. 이를 막을 무기가 필요했다.”
-북한은 중국처럼 핵무기 개발과 경제 건설을 동시에 할 수 없다.
“옳은 말이다. 북한은 핵 저지력에 만족하니 이제는 경제로 나갈 것이다. 소위 가난한 사회주의 나라의 특징인 ‘빈곤의 힘’이란 게 있다.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면 실수한다.”
-러시아는 중국과 상하이협력기구(SCO)를 만들었다.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국경과 중앙아시아에서의 안보를 지키려는 게 목표다.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중앙아시아로 확대되는 것을 막고 옵서버인 이란·터키와 같은 이슬람 세계와 대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시리아에서 알아사드 대통령을 보호하는 게 러시아에 무슨 이익인가.
“시리아에는 기독교 인구가 많고 우리와의 관계는 미국이 지도에 나타나기도 전인 옛날로 올라간다. 러시아·중국은 리비아에서 큰 실수를 했다. 리비아 붕괴 계획이 없고 정치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미국과 서방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러시아·중국은 ‘어떤 나라도 타국에 지도자나 체제를 강요해서는 안 되며 그건 그 나라 국민이 결정할 일’이란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다.”
-일본과는 쿠릴열도 분쟁이 있다. 섬 두 개 반환으로 푸나.
“일본이 평화조약에 서명한다면 그럴 수 있다. 문제는 네 개를 다 돌려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련은 테헤란·얄타 회담에 따라 대일전에 참전했다. 3개월 만에 서부전선의 부대를 1만5000㎞ 떨어진 극동으로 옮겼다. 종전 뒤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따라 4개 도서를 받았다. 그럼에도 1956년 평화조약에 서명하면 두 개 섬을 일본에 선물로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두 개는 안 되고 네 개를 요구하라. 그럼 오키나와를 반환한다’고 일본을 부추겼다. 그러다 60년 미·일 방위조약이 서명돼 소련은 입장을 철회했다. 그 후 25년간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은 ‘영토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전에 도쿄를 방문했을 때 ‘두 개를 반환하겠다. 시베리아에 투자하라’고 한 것은 56년으로 돌아간 것이다.”
-푸틴은 강한 러시아를 꿈꾼다. 그러려면 군사력 같은 하드파워 말고 민주주의, 인권 같은 소프트파워도 필요하다.
“소프트파워 구축은 진행 중이다. 불만세력이 자유를 말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식으로 일하면서 미국식으로 살려는 것이다. 아무 책임이나 의무도 안 지고 원하는 것을 받으려는 사람들이다. 많은 이가 이중 국적자이거나 외국 영주권을 갖고 있다.”
-그래도 좀 더 많은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가 필요한 게 아닌가.
“지금 언론은 쓰고 싶은 것은 뭐든 쓴다. 한번 에호 모스크바(모스크바의 메아리 방송)를 들어보라. 가스프롬(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의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도 24시간 대통령을 비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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