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경상도가 반역향으로 찍힌 기간은 135년간으로서,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찍힌 기간 3년의 무려 45배나 되었었습니다.
경상도에 대한 차별은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시작하여 1863년 대원군이 집권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기 까지 무려 135년간이나 지속된 반면, 전라도에 대한 차별은 1589년 (정여립의 난)에 시작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 발발 직후를 즈음하여 끝났으니 고작 3년여간 지속된 셈입니다. 전라도에 대한 차별이 이렇게 신속하게 끝난 데에는 전라도가 왜란 도중 항왜(抗倭)의 거점으로 구실하고 전라도 의병과 이순신 휘하 수순의 활약이 왜군을 퇴치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중요한 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일례로, 정유재란 이후 선조 30년 2월 선조는 다음과 같이 말 하였습니다:
"멀리 있는 남도의 백성들아 짐의 말을 들을 지어다. (중략) 지난 기축년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도내의 걸출한 인물들을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고짝기에 홀로 향기를 뿜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옥이 형산에 자취를 감추었었도다. (중략) 이제야 난을 당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하니, 그대들 보기에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도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왜란중에 공공연히 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 없이는 나라도 없다)고 하신 것은 당시 나라를 구함에 호남의 역할이 얼마나 중차대했음에 조야를 막론하고 이론이 없었음을 반증합니다. 만약 조정의 분위기가 그때까지도 "호남 반역향" 운운하는 분위기였더라면 충무공이 아무리 호남의 공헌을 체감 했었더라도 공공연히 그런 발언을 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왜란 종결 이후 많은 세대가 지난 후, 정종이 전라도를 두고 하신 最名賢節義之鄕 (최고로 유명한 선비와 절의의 고장이로다)이라는 칭송도 당시 호남 선비의 조정등용이 얼마나 왕성했는지를 말해 준다 하겠습니다.
반면, 경상도는 영조의 전왕인 경종을 영조가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빌미로 경상도 남인이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으킨 1728년의 무신난 (戊申亂), 즉 이인좌의 난 이후 무려 135년이 지나 대원군이 집권하여 탕평책을 쓸 때까지 "반역향"의 라벨을 붙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영조의 경상도에 대한 철저한 배척은 그가 닌 평정 후 대구에 세운 "경상도를 평정했다"는 의미의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또 영조 이래로 경상도 출신 당상관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은 그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벼슬길에서 소외된 경상도 선비들은 135년간 서원에 모여 공리공담 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헐린 서원은 경상도가 전국 최다였던 점이 말해줍니다.)
참고로, 순조,철종대에 소위 세도정치를 편 안동김씨는 언뜻 보기엔 경상도 기반인듯 하나 사실은 전혀 경상도 지역하고는 연고의식 자체가 없었습니다. "안동" 김씨가 그 시조라 하여 명목상 안동김씨라고 불리웠지 실은 한성에 토착한지 수백년된 서울 문벌로서 서울 장동에 집거한다 하여 "장동 김씨"라고 자타가 일컬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안동김씨 세도 기간 중에도 그들은 지역단위로서의 경상도 차별 시정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경상도 차별의 시발점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 시발점은 1717년 조선의 19대왕 숙종의 소위 "정유독대"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 세자 균 (후일의 경종)이 병약한점을 우려하여 경종 사후 자신의 또다른 아들 연잉군 (후일의 영조)가 대를 잇는걸 확실히 해달라고 노론 영수 이익명에게 부탁한것이 바로 정유독대입니다. 숙종 사후 노론은 숙종의 유지대로 연잉군을 세자로 세우며, 연잉군은 급기야 일찍 죽은 경종 뒤를 위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영조입니다. 영조의 즉위로 정치적 기반이 위태롭게 된 소론, 그중에도 과격세력은 숙종대의 "갑술환국" (인현왕후 복위문제로 서인이 남인 축출하고 집권한 사건)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과 공모하여 영조와 그 주변 노론을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경종을 영조가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것을 빌미로 영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장의 증손 밀풍군 탄을 세울 모반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영조가 뜻밖에 소론 정권을 들여 세우자 명분이 없어 지고, 동조자도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급기야는 조정에 고변됨에 이릅니다. 기밀이 누설되었음을 안 반역 세력은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어 이인좌가 선봉이 되어 반란의 깃발을 듭니다.
<이인좌 난의 평정과 "반역향"으로서의 경상도 차별 시작>
1728년 3원 15일. 스스로 대원수를 칭한 이인좌는 청주성에 진입해 충청 병사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 지자 경상도의 전역이 일제히 호응하였는데,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 이응보, 인척 조성좌와 함께 경상도 합천과 함양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그 기세를 타서 북상하던 경상도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대패하고, 청주성도 도로 빼앗긴 후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 주도 세력이 생포되자 반란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 사건에 분개한 영조는 대구 감영 입구에 평영남비를 세우고 이 사건을 경상도 지역의 반란으로 규정 짓습니다. 나아가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지목해 일체의 과거 응시를 금지시키고, 앞으로도 절대 등용 말라고 유시하는 초강경 조치를 취합니다. 영조 10년 이조판서 송인명이 "영남사람은 비록 추천되더라도 낙점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하며 영남 차별에 문제 제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또 영조 13년에는 좌의정 김재로가 "조정에서 영남인에 대한 대우를 다른 道와 다르게 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그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 지를 말해 준다 해겠습니다.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경상도 반란으로 규정지을 정도로 온 경상도가 벌떼 같이 반란하여 일어 난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경상도가 남인 지역이며 이인좌 본인이 소론 이면서 경상도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경상도의 반란 호응을 경종 신원을 빌미로 정권을 한번 잡아 볼까하는 기회주의적 작태로 꿰 똟어 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 이후로 남인의 등용은 제한 되었고, 비록 이 난에 직접 연관이 없었다 해도 경상도 출신은 일종의 "연좌제"에 묶여 출사나 진급을 금지당했습니다. 영조 13년 병조판서 민응수가 "영남의 풍속이 벌써 변하여 옛날의 경우 모두 남인이었는 데, 지금은 그중에 더러 갈리어 나간 자도 있습니다"고 한것은 경상도가 얼마나 남인 일색이었는지, 또 영조가 얼마나 경상도와 남인을 한 묶음으로 반역집단시 했는지를 반증 해 준다 하겠습니다.이러한 영남 차별은 영조,정조 대는 물론 순조, 철종을 이어 고종 즉위와 함께 대원군이 집권하여 탕평책을 쓸때까지 무려 135년간 거의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숙종이 영조를 꺼려한 것은 그의 어머니 최씨가 궁중 나인들의 빨래를 해주는 무수리였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이미 관계를 가진 뒤에야 알게 된 것으로, 최씨는 처녀가 아니라 남편이 갓 죽은 과부였던 것이다.
신분의 비천함은 제쳐 두더라도, 과부를 후궁으로 맞이함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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