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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또랑i 2011. 5. 8. 15:29

흔히들 유태인하면 우리는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를 상기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600만의 유태인이 살해당했다는 것은 알지만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당해야 했는지는 잘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지구건너편 유태종족과 얼굴 볼 일도 없었던 한국인으로선 유태종족이 받아야 했던 증오의 역사가 이해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은 현재 팔레스타인 및 중동지역에 걸쳐서 이룩되어 있다가 앗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등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그 민족은 뿔뿔이 흩어지게된다. 로마시대때 많은 유태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된다. 하지만 그땐 이미 베두인, 아랍인, 기타등등의 인종들이 상당수 그 땅에 살고 있었고 유태인들은 결국 그들과 이웃으로 섞여서 살게된다. 얼마 안있어 유태인들이 주도한 반란이 로마군에 패퇴되고 유태인은 또다시 흩어지게된다. 그 후로 약 이천년간 유태인들은 떠돌게 되는데 ... 대충

 

 

- 서유럽지역에 정착한 유태인들

 

- 동유럽과 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유태인들

 

- 북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한 유태인들

 

-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은 유태인들

 

 

등으로 나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은 유태인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때를 걸쳐 계속 살아갔는데 이들을 Old Yishuv라고 부른다. 이들은 한때는 오스만 제국의 고위관리까지 올라가는 인재를 배출하곤 했지만 대부분의 유태인들은 가난하고 지역 주민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다. 19세기 (1800년대) 이 지역을 여행한 서방 여행가의 기록을 보면, 이 지역 유태인들은 어린아이가 손을 들어올려도 흠칫 해서는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모로코 지역을 여행하던 여행가는 그 지역 어리아이가 3-4살 꼬마들을 모아놓고 유태인에게 돌을 던지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걸 목격한다. 그 아이가 유태인 어른에게 다가가 침을 뱉어도 당한 유태인은 그저 순종적으로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유럽지역에서 유행처럼 행해지던 유태인 살육에 휩싸이지는 않았지만 종종 주민들의 불만이 엉뚱하게 유태인에게 전이되어 수백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하거나 생활기반을 빼앗기는 일이 꽤 되었다. 예를 들어 18세기 바그다드에선 대략 삼천명의 유태인들이 살해당하거나 약탈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종종 (보다 소규모로) 일어나곤 했다.

 

 

유럽, 특히 동유럽에 정착한 유태인들은 그 정도가 더 심했는데, 특히 러시아제국시절 19세기에 발표된 차별화법안으로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타마을의 지역주민들에게 습격을 받아 약탈되고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유태지식층은 융화정책, 즉 살고 있는 곳에 융화되어 그 지역(나라) 사람이 됨으로써 결국 동등하게 대우받고자 했으나 이 차별화법안으로 절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유태인들은 서서히 유태인들로만 이루어진 나라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이 논의가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되게 된다. 20세기초 (1900년경) 러시아는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는데, 당시 러시아 황실이 새로운 차별화법안을 발표함으로써 대대적인 유태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키시네브시에서 400여명이 죽고 더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좀 더 후의 일이지만 러샤 혁명당시 백군이 주도한 탄압으로 인해 대략 삼만명의 유태인들이 죽음을 당한다.) 이 때부터 유태인들은 자위권을 발동해서 스스로 무기를 들고 폭압에 반항하기 시작한다. 키시네브 사태에서 이미 유태인 자위민병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이런 차별화법안, 지역주민들의 습격, 정부의 무관심으로 인해 최초의 팔레스타인 이주민은 많은 수가 러시아쪽에서 오게 된다.

 

 

서유럽에서도 중세시대까지만해도 유태인탄압을 꽤 심각했다. 특히 십자군 원정이 일어났다하면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 유태인 마을은 결코 안전할 수가 없었다. 많은 유태인들이 뇌물을 바치며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죽음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왕들은 유태인마을에서 나오는 자금이 유용했으므로 되도록이면 유태인들 보호하려 했지만 성난 십자군들이 작당을 하고 마을을 공성하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번지기 일쑤였다. 중부독일지역에 모여 살던 유태인마을들 몇몇 곳은 이런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주민들이 살해당하는 참상을 겪기도 했으며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믿음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심지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십자군을 기다린 유태인 여자의 일화도 있다.) 19세기들어서고 인권이 좀 더 강화되면서 이런 식의 무식한 살육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위로슨 지도층부터 밑으로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유태인에 대한 차별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착각을 하는 것이 있는데 유태인과 기독교의 관계이다. 엄밀히 말해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두 세력은 철천지 원수지간이다. 유태인이 바로 기독교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으니까. 유태인에 대한 박해 (특히 유럽에서의 박해)는 이런 기독교적 배경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저한 기독교신자의 입장에선 유태인은 그들의 구세주를 죽인, 한국말로 하면 같은 하늘을 이고는 살아갈 수 없는 종족이었던 것이다. 이슬람은 이보다 좀 더 관대했지만, 코란에서 나온 바와 같이 유태인들은 저열하고, 약한, 쓰레기 종족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코란에 보면 나오는 유태인들에 대한 살해가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들어서면 이천년간 당해오던 폭압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태인은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만들 것을 결의하고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18,19세기등을 거치며 유태인들은 살고 있는 지역에 융화되길 원했으나 대부분 위와 같은 탄압을 받았고, 탄압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만의 나라가 없기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는 당시 팔레스타인지역 지배자였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접촉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독일제국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당시 이런 움직임은 유럽강대국들의 의도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당시 독일황제 빌헬름2세는 친척에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유태인들이 비록 우리의 구세주 (예수)를 죽인 원수이긴 하지만 그들을 나라밖으로 보냄으로써 우리의 근심을 덜수 있고, 그들의 재능 (자금력)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 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제국은 오스만과 동맹관계였기에 실질적인 도움은 실패하고 유태인들은 영국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영국은 처음에는 아프리카 땅덩이 (우간다 지역)을 제공하려고 했으나 유태인들은 많은 논란끝에 팔레스타인이 아니면 안되다는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게된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대로 절박한 사정이 있고, 아랍은 여태껏 종넘처럼 취급하던 유태인들에게 두 눈 멀쩡히 뜨고 안방을 내줬으니 복장터질 노릇인 것이다. 세상에는 선악의 경계선을 긋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중동사태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글쎄, 내가 유태인이었다면 과연 살고 있는 지역에서 온갖 학대를 받다가 마누라,딸들은 강간당하고 재산은 약탈당하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수단방법 안가리고 욕을 처먹더라 나라를 세우는데 일조해서 내 가족의 미래를 보장할 것인가, 답은 쉽게 나온다. 반대로, 내가 아랍인이면 두 눈 뜨고 내 안방에서 여태껏 무시하던 넘이 나라를 세우는데 가만히 있를 것인가? 요것도 답은 쉽게 나온다. (사실, 유태인 이주자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내세워서 아랍 지주들에게 땅을 사들였다. 당시 땅값이 5000%로 폭등했다니 할 말 다한 셈이다. 땅을 사는 유태인이던 땅 파는 아랍지주들이던 그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아랍농부들의 사정은 생각치 않았다고 보면 된다. 어쨌거나 땅거래는 합법적이었으니까) 이번 사태은 두 개의 물러날 수 없는 정의가 맞부딪힌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두 세력다 목숨을 걸고 미래의 생존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아슈케나지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북동 유럽계 유대인으로 옛날 카자르(Khazar) 왕국을 세웠던 터키(돌궐족)계 카자르인의 후손이다. 따라서 현재 유럽과 미국에 퍼져 있는 유태인들은 대개가 투르크계라 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유태인의 숫자는 약 1,500만~1,8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오늘날의 유태인들을 크게 ‘아쉬케나지’(Ashkenazim)와 ‘세파라딤’(Sepharadim), 그리고 이디오피아계인 ‘팔라샤’(Falasha) 등 세 부류로 나눈다.

 

이 가운데 순수 셈족으로 알려져 있는 세파라딤 유태인은 과거 유럽으로 이산한 유태인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거주했던 사람들과 그 자손들을 말한다.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한 세파라딤은 중세시대 전 세계 유태인의 절반을 차지했고 라디노어(유대스페인어)를 사용했다.

 

일례로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주 경기장이 위치한 몬주익(Montjuic) 일대는 과거 유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몬주익은 `유태인의 산`을 뜻한다.) 그러나 1492년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두 가톨릭 왕들이 마지막 남은 이슬람 지배 지역인 그라나다에 입성 합으로써 스페인에 대한 아랍의 지배는 종식됐다.

 

유태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만약 개종하지 않으면 스페인에서 떠나야만 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는 약 50여만 명의 유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5만 명이 1500년 가까이 살아온 고장을 떠나기 싫어 부득이 스페인에 잔류했으며 나머지 유태인들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했다.

 

반면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북동 유럽계 유대인으로 옛날 카자르(Khazar) 왕국을 세웠던 터키계 카자르인의 후손이다. 카자르 지방은 현재의 남러시아의 평원으로 8세기경 이 광대한 초원에서는 터키계의 사람들, 즉 카자르 족은 상인, 직인, 무사로 살았다. 이 무렵 카자르 왕국은 비잔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았다.

 

이에 740년경 불란(Bulan)왕은 양쪽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유태교를 국교로 정하고 국민 대다수를 유태교로 집단 개종시켰다. 카자르 왕국은 9세기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 956년 우크라이나 왕국의 스비아토스라프 왕의 침략을 받고 몰락했다.

 

그 후 아시아로부터 온 몽골군이 유럽으로 원정을 오자 카자르인 들은 몽골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매부리코로 유명한 동부 유럽의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실제로는 터키계인 카자르 족의 후손인 셈이다.

 

현재 아쉬케나지는 미국, 이스라엘, 유럽, 남아공에 약 1,200만 명(전세계 유대 인구의 70%차지), 세파라딤은 이스라엘,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 약 450만 명, 팔라샤는 이스라엘, 이디오피아, 예멘 지역을 합쳐 약 2만 명 정도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디아스포라  

('분산'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히브리어로는 Galut
('유배'라는 뜻).
유대 왕국이 패망하여 바빌로니아로 유배당한 뒤 이방인 사이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들(→ 바빌론 유수).
또는 '유배되어' 팔레스타인 곧 오늘날 이스라엘 지역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나 유대인 공동체를 총칭한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진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지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과 자신들과의 특수한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철학적·정치적·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은 마지막에 '유배당한 자들을 한데 불러모은다'는 전통적 유대교의 메시아 희망에서부터, 하느님이 세계 전역에 순수한 유일신앙을 촉진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흩어놓았다는 개혁 유대교의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초의 중요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BC 586년의 바빌로니아 포로 때문에 생겼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유대 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 가운데 일부를 노예로 삼아 끌고 갔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이 BC 538년 유대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을 때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일부는 자발적으로 유배지에 머물러 살았다.
초기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하며 문화적으로도 가장 창조적이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성했는데, BC 1세기 그곳의 인구 가운데 40%가 유대인들이었다. AD 1세기경에 팔레스타인 바깥에 살던 유대인들의 수는 대략 5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가운데 4/5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지만,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종교생활과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보았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도 이미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그뒤 유대교의 주요중심지는 바뀌었으며(예를 들면 바빌로니아·페르시아·스페인·프랑스·독일·폴란드·러시아·미국), 유대인 공동체들은 점차 뚜렷이 구별되는 언어·의식·문화 들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어떤 공동체들은 다른 공동체들에 비해서 비유대교적 환경 속으로 보다 철저히 빠져들어갔다. 어떤 공동체들은 평화롭게 살았지만, 다른 공동체들은 격렬한 반유대주의(anti- Semitism)의 희생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역할과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할 필요성 및 그 중요성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정통파 유대인들은 시온주의 운동(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 운동)을 지지하는 반면, 일부 정통파 유대인들은 현대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때에 자기의 메시아를 보내려는 뜻을 방해하는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국가로 여기고 그것에 반대한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지하는 '셀릴라트 하갈루트'(shelilat ha-galut:유배를 부정함) 이론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안에서의 유대인의 삶과 문화는 동화(同化)와 문화적 특성의 상실로 말미암아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유대인들만 유대인으로서 존속할 희망을 갖는다고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입장을 비롯해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다른 어떤 입장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립이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관한 성서 예언의 성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혁파 유대인들은 미국을 포함해서 다른 여러 곳에 사는 디아스포라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지만, 1937년 미국 랍비 중앙협의회는 유대인들이 더이상 이스라엘로 귀환할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선언한 1885년의 피츠버그 강령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조국 수립을 지원하도록 적극 장려했다. 그러나 1943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미국 유대교 협의회는 유대인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이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고국에 주는 일체의 지원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불충스런 행위라고 선언했다.
유대인 국가 설립을 위한 지원은 종종 박애적인 이유만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오늘날 전세계에 사는 약 1,45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310만 명 가량이 이스라엘에, 590만 명 이상이 미국에, 그리고 210만 명 이상이 소련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