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 수기치인이다.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본래 공자의 유교라는 것은 인류 보편적 질서, 인간 내면의 심미적인 부분을 중점을 두는 내용이었다. 또한 고대 사회의 야만스러운 풍속을 정리 하기를 원했으므로 사회 본편적 질서, 계급 간의 상호 존중, 등을 이론화하였다.
한나라 시대 초기에는 순장도 존재하였고, 왕족 간의 근친혼도 존재하였다. 이것은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지만 당시에는 교리화되지 않았으므로 세부적 제반 사항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한나라 시대는 유교 이론은 자연스러웠고 성리학의 획일성, 계급성을 내포하지는 않았다. 한나라 중기를 거쳐 후대에 이르면 유교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순장, 근친혼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시대와 같이 여성의 평생 순결을 강조하거나, 지나친 계급 체제의 합리화는 유교에 존재하지 않았다.
성리학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요소가 포함된다. 유교 추종자들은 공자의 이상을 교리화하고 강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되며, 성리학으로 발전 시킨다. 또한 명나라 시대에는 권력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배 체제를 강화화기 위하여 성리학 이론을 이용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성리학을 이용하여 사회를 통제하기를 원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이 고려 후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지나치게 계급화되고 교리화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여성에게 가혹한 법칙들이 생겨났다. 성리학의 이와같은 문제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성리학이 유교 이론에서 파생되었다는 근거 때문에 유교도 비난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성리학에 제기된 문제 때문에 유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론 또한 문제가 있다. 공자가 유교를 창시하였으나, 그 후 맹자, 순자 등을 거쳐 변형이 되었고, 명나라 때의 성리학은 공자가 창제한 유교와 같다고 하기에는 도그마적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공자가 창시한 유교, 맹자와 순자가 개량한 유교, 교리화된 성리학은 분리되어 다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그 이론들도 철학적 요소가 다르며, 그것이 적용되는 양상도 시대에 따라 모두 달랐다. 한나라 시대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으나, 명나라 시대와 같이 억압적인 규칙이 없었던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