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 입학할 때 부모님은 보루네오 책상을 사 주셨다. 그 책상은 무척 튼튼해서 배트맨 흉내를 내며 올라가 뛰어도 끄떡없었다. 고교 졸업 때까지 12년 학창 시절을 함께한 보루네오 책상은 너무 오래 썼다는 이유로 바꿀 때도 어디 하나 상한 데가 없었다.
얼마 전 보루네오의 상장 폐지 소식을 듣고 그 책상이 다시 떠올랐다. 1988년 국내 가구업계 최초로 상장됐던 보루네오가 29년 만에 증시를 떠났다. 마지막 거래 가격은 주당 49원. 1980년대 서민과 중산층이 선호하는 대중 가구로 이름을 떨쳤던 1위 업체의 초라한 퇴장이었다. 보루네오의 자랑은 화려하진 않아도 단단한 내구성이었다. 1990년대 혼수로 보루네오 가구를 장만한 50대 부부 중엔 "아직도 멀쩡히 쓰고 있다"는 이가 많다. 무리한 해외 진출로 1991년 법정관리를 경험한 보루네오는 2000년대 들어 사세(社勢)가 크게 위축됐다. 한샘 등 후발 주자들이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승부수를 던질 때 보루네오는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정체성을 잃었다. 트렌드를 좇는 젊은 세대와 여전히 튼튼함을 찾는 어른 세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어중간한' 브랜드로 쪼그라들었다. 가구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조급해지자 2010년 이후 건강 기능 식품, LED 조명 등 분야에 뛰어들었다가 손해만 봤다. 그 사이 경영권 분쟁까지 벌어져 5년간 최대주주가 10번 넘게 바뀌었다. 지난해 영업 손실은 155억원으로 불어났다. 증시 퇴출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최근 코스피가 2400선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끌어올린 지수의 이면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2000개쯤 되는 상장 기업 중 상당수는 지금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코스닥 기업 10곳 중 4곳은 적자이고, 상장 폐지 기로에 서 있는 곳도 여럿이다. 대기업 국제 경쟁력도 갈수록 처지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7월 기준으로 글로벌 시가총액 5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이다. 2010년 말 8개에서 6년여 만에 6곳이 순위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현대차와 포스코·현대모비스·LG화학 등이 500위 밖으로 빠졌고, 300위권이던 현대중공업은 1700위대로 밀려났다. 이 중 어떤 기업은 위기의 원인을 '중국의 사드 보복 때문'이라 하고, 어떤 기업은 '업황이 나빠서'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 경영 환경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 아닌가. 외부 탓만 할 게 아니라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경제 부처 장관을 지낸 한 원로 인사는 "바깥에 태풍이 불 때도 집에서 끊임없이 연구·개발 같은 '팔굽혀펴기'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기업이 안 보인다"고 했다. 체질 개선과 변화에 실패한 기업이 도태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삼성전자도 예외일 수 없다. 코스피 2400이라는 숫자에 취해 있는 동안 위기는 우리 곁에 더 가까이 다가왔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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