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2

변발

또랑i 2015. 10. 6. 16:50

앞머리는 깎고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이다. 거란족은 위의 그림과 같이 양 옆 조금만 남기고 다 밀어버렸으며, 몽골족은 앞머리와 좌우 양쪽의 머리를 조금 남긴 후 귀 뒤 2갈래로 길어 늘어놓았다. 여진족, 만주족은 뒷머리의 일부만 남기고 죄다 깎아버린 후 남은 뒷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놓았다. 굳이 머리를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전쟁시에 편하라고 이렇게 했다는 의견이 대세다. 과거 냉병기 시절 전투는 두꺼운 옷 위에 쇠로된 갑옷을 입고 역시 쇠로 된 투구까지 쓰고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이때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어 열을 빨리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었던것. 아무래도 다른 부위에 비해 뇌가 열받으면 훨씬 후유증이 크다는 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잦았던 유목민족들에게도 마찬가지. 사실 변발이 유행했던 지역은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물을 아끼기 위한 측면도 컸다. 사실 지금도 위구르같은 경우는 모든 남자들이 아예 스킨헤드를 기본 스타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을 정복한 유목민족들은 이 머리를 한족들에게도 강요했는데, 특히 이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에 심했다. 1644, 순치제는 치발령을 내려 이 머리를 모든 한족들에게 강요했으며 이는 청 대를 이어가며 중국의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치발령이 떨어질 당시에는 아직 남명과 같은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한족들은 야만족의 풍습을 따를 수 없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 게다가 머리를 한 가닥만 남긴다는 자체가 조선의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 처럼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에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히 보수적 경향이 강했던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 때문에 본보기로 성 하나를 전부 도륙한다는 도성(屠城)을 시행해 양주 대학살과 가정삼도가 일어났다.

 

청나라는 산해관 입관 후 이듬 해 남명 정권을 붕괴시키고 명나라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자 전국에 변발령을 내리면서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留頭不留髮),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겨 두지 않겠다(留髮不留頭)"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엄포가 아닌, 말 그대로 '천명'이었으며, 이에 불응하는 것은 천명에 거스르는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청나라는 변발령을 결연한 의지로 밀어부쳐 체발(剃髮)에 불응하는 자가 새벽에 잡혀 오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저녁에 잡혀 오면 저녁 해가 지기 전에 가차없이 처단하였고, 변발령에 저항하여 일어난 봉기들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한편 변발령을 집행하는 관리가 마을을 방문할 때 체발 도구와 함께 먼저 거쳐 온 마을에서 체발에 저항하다 참수된 자들의 수급을 다발로 엮어서 가지고 왔다고도 하며, 고을 안에 변발을 하지 않은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고을의 관원들도 한 묶음으로 처벌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록 체발을 했더라도 규정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면 역시 처벌되었는데, 위의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앞머리를 체발하고 뒷머리를 남겨 놓은 소위 음양두(陰陽頭)는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것으로서, 원래 변발은 동전 크기만한 면적의 머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체발하는 소위 금전서미(金錢鼠尾)로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머리는 동전 크기만 남기고 모두 체발하며, 남겨 놓은 머리를 땋았을 때 그 굵기가 동전을 꿰는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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