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정치국
최근 중국의 시진핑(習近平)이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돼 사실상 차기 지도자로 내정됐다. 그는 현재 당 서열 6위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후계자 선정을 비롯, 당과 국가 정책에 관한 주요 결정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몫이다. 9명의 상무위원이 중국을 움직이는 셈이다. 중국 공산당의 역대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은 중국 현대정치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노선과 권력을 둘러싼 그들의 투쟁과 암투는 현대의 삼국지다.
정치국은 옛 공산권 국가의 독특한 정당 기구다. 이들 국가에서는 공산당이 국가기구를 이끌고 당은 20명 내외의 정치국원들이 지도한다. 그중 10명이 안 되는 핵심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 정치국원과 상무위원은 공식적으로 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선 반대로 소수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정치국원과 중앙위원을 뽑는 게 현실이었다. 중국도 처음엔 다르지 않았으나 점차 제도에 의한 인사가 정착되고 있다.
마오쩌둥(왼쪽)과 덩샤오핑. 둘은 신중국을 건설한 동지였지만 문화대혁명 때 마오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한 덩을 숙청한다. [중앙포토]중국 공산당은 1921년 설립됐고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27년 7월 임시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가 시초였다. 나중에 마오쩌둥(毛澤東)과의 노선투쟁에서 밀려 국민당으로 전향한 장궈타오(張國濤)가 서열 1위의 상임위원이었고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초기부터 상임위원이었다. 공산당이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의 공세에 밀려 날로 위축되던 시기였다.
35년 1월 구이저우(貴州)성 준이(遵義)에서 열린 제6대 전국대표대회(6기) 정치국 확대회의는 괴멸 직전의 공산당에 새로운 전기였다. 당권을 쥐고 있던 보구(博古) 등 친소련파는 국민당에 연전연패한 책임을 져야 했고 농촌을 혁명의 중심으로 삼고 게릴라전을 펴자고 주장한 마오의 노선이 채택됐다. 이때부터 마오가 상무위원에 이름을 올리며 당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마오는 대장정과 중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43년 정치국 주석이 됐고, 45년 7기 제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중전회)에선 당 중앙위원회 주석에 선출돼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됐다.
중일전쟁·국공내전을 거치며 등장한 7·8기 지도부엔 새로운 인물들이 부상했다. 류사오치(劉少奇)는 마오 사상을 체계화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나란히 당 지도사상의 반열에 올렸다. 45년 장제스와의 담판에 마오를 대리해 참가하면서 류는 당내 2인자로 인정받았다. 야전에서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끈 덩샤오핑(鄧小平)과 린뱌오(林彪)도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49년 신중국 선포 당시 최고지도부는 끈끈한 동지애로 뭉쳐 있었다. 하지만 마오가 계급투쟁 등 정치적 측면을 여전히 중시한 데 반해 류·덩 등은 ‘혁명에서 건설로의 전환’을 내세우며 경제성장을 우선시했다. 이들은 제1차 5개년 계획(53~57년)의 성공을 발판 삼아 마오의 일방적인 리더십이 아닌 집단지도체제로의 전환을 꾀했다.
위기를 느낀 마오는 58년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는 구호를 앞세워 대약진운동을 일으킨다. 생산의 집단화, 사유재산 폐지 등 좌경 모험주의 노선을 채택한 이 운동은 무리한 목표 설정과 주먹구구식 운영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참극으로 끝난다. 마오는 59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류에게 국가주석직을 내놨고 실용노선을 내세운 류와 덩이 권력의 전면에 부상했다.
2선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마오는 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최고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인민들에겐 여전히 신적 존재였다. 류와 덩이 이끄는 당 지도부가 ‘수정주의자’들로 가득차 있다고 느낀 마오에겐 이를 뒤엎을 대중의 힘이 필요했다.
마오의 아내 장칭(江靑) 등은 한 편의 희곡 내용을 빗대 ‘마오 주석이 수정주의자들에게 포위돼 있다’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선동했다. 순식간에 ‘마오 주석을 지키자’며 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했다. 중국을 10년간 무정부 상태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상황이 무르익자 마오는 66년 8월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글을 발표해 류의 당 지도부를 겨냥했다. 같은 달 열린 8기 11중전회에서 서열 2위였던 국가주석 류는 8위로 밀려났고 마오의 친위세력인 린뱌오가 2위로 부상했다. 타오주(陶鑄)·천보다(陳伯達) 등 마오의 측근이 대거 상무위원회에 진출했다. 류는 68년 당에서 제명당한 후 이듬해 감옥에서 사망했고 덩 역시 이후 실각했다.
69년 출범한 9기 1중전회에서 마오는 린뱌오가 공식 후계자라고 당헌에 명기했다. 하지만 후계를 노리는 장칭 등 4인방과 린의 권력다툼은 계속됐다. 국가주석직 승계 시도가 실패하자 조급해진 린은 마오의 암살을 획책했다가 실패한다. 린 일행은 러시아로 달아나던 도중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73년 열린 10기 1중전회에선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 등 4인방이 득세한 가운데 저우와 예젠잉(葉劍英) 등 원로들이 이들을 견제하는 구도가 성립됐다. 마오는 사망 직전인 76년 4월 후난(湖南)성 당 서기 출신의 화궈펑(華國鋒)을 상무위원회에 올렸고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76년 9월 마오의 사망은 엄청난 권력 공백을 가져 왔다. 4인방의 쿠데타 음모를 감지한 예젠잉은 화궈펑을 설득해 불시에 4인방을 체포한다.
당 주석에 오른 화궈펑은 마오의 말은 무조건 진리라는 ‘양개범시론’을 내세워 자신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했다. 하지만 마오에 의해 실각됐다가 공직에 복귀한 덩은 ‘실천만이 이론의 기준’이란 실용노선으로 양개범시론과 맞서는 한편 자신의 사람들을 권부로 끌어들였다. 천윈(陳雲)·리셴녠(李先念) 등 혁명 원로와 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 등 덩을 따르는 후배들이 속속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덩의 실용노선은 문혁에 시달린 당 간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결국 78년 11기 3중전회에서 그의 주장이 당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됐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선회하는 시발점이다. 화궈펑은 당 중앙위 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11기 6중전회) 세력을 상실했다. 덩 자신이 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맡고 중앙위 주석(이후 총서기로 명칭 변경)은 후야오방이, 국무원 총리엔 자오쯔양이 오르며 덩의 시대가 열렸다.
덩의 후견에 힘입어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경제특구 건설 등 개혁개방 정책을 밀고 나갔다. 하지만 보수파의 반발도 거세졌다. 자본주의 물결에 사회주의의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후차오무(胡喬木) 등 이론가 집단과 계획경제 체제에 익숙한 천윈 등 원로 그룹은 지도부를 우경분자라고 비판했다.
개혁개방정책은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진화해 86년 베이징을 비롯, 전국 대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요구는 당 지도부가 설정한 사회주의 체제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보수파는 즉각 지도부의 책임을 물었고 87년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후야오방은 총서기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11월 출범한 13기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선 자오쯔양(총서기)·차오스(喬石)·후치리(胡<555F>立) 등 개혁파와 리펑(李鵬)·야오이린(姚依林) 등 보수파가 양립했다. 덩과 천윈 등 원로는 상무위원에서 물러났다.
개혁파의 시련은 계속됐다. 개방의 후폭풍으로 물가가 폭등하자 자오는 경제 문제를 총리인 리펑에게 넘겨야 했다(88년 13기 3중전회). 이듬해 4월 후야오방의 죽음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열망에 다시 불을 지폈다. 천안문광장은 한 달 넘게 시위로 불타올랐고 유혈진압 끝에 막을 내렸다. 덩은 시위대에 온정적인 태도를 보인 자오에게 등을 돌렸고 자오는 모든 당직이 박탈됐다. 그해 열린 13기 4중전회에선 상하이시 당 서기 장쩌민(江澤民)이 총서기에 올랐다.
장쩌민은 중앙 정계에선 무명에 가까웠지만 개혁개방 경제를 지향하면서 정치적으론 보수 성향이어서 덩이 적임자로 판단했다. 공식적으로 모든 공직에서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덩의 영향력은 컸다. 천안문사태 이후 정부의 보수화가 두드러지자 그는 92년 남방의 경제특구들을 돌며 개혁개방의 성과와 필요성을 역설했다(남순강화). 이는 장쩌민이 보수파를 누르고 개혁 기조를 유지하는 계기가 됐다. 92년 출범한 14기 지도부에서 야오이린·쑹핑(宋平) 등 보수파가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탈락한 반면 주룽지(朱鎔基)·류화칭(劉華淸)·후진타오(胡錦濤) 등 개혁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93년엔 주룽지가 와병 중인 리펑을 대신해 총리와 인민은행장까지 맡아 경제도 개혁파 손에 넘어갔다. 96년 덩의 죽음에도 장쩌민 체제는 흔들림 없이 15기로 이어졌다.
후진타오는 91년 덩이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내정함으로써 일찌감치 차기 후계자로 낙점됐다. 장쩌민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물이었지만 장은 덩의 유지를 거역하지 않고 2002년 16기 1중전회에서 후진타오에게 당을 넘겼다. 이로써 후계자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암투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었다. 대신 장쩌민은 공산당의 역할을 규정한 자신의 ‘3개 대표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덩샤오핑이론과 나란히 당헌에 삽입했다.
2007년 17기 1중전회에선 시진핑·리커창(李克剛) 2명의 5세대 지도자가 상무위원이 됨으로써 10년 만의 권력교체라는 관례가 사실상 제도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