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일본 천황 성씨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지난 2001년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란 취지의 발언을 한 것도 고인의 연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일왕은 2001년 12월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桓武) 천황(50대 일왕ㆍ737~806년)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했다.
"703년 야마토(大和)정권은 高句麗의 멸망으로 돌아갈 땅을 잃어버린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잣코)에게 왕(王)이라는 성(姓)을 하사했고, 약광은 간토(關東)지방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高句麗 출신 1,799명을 이끌고 무사시노(武藏野) 벌판 일대에 정착해 이곳이 고려군(高麗郡)이 되었으며 약광이 군장으로 부임했다는 내용이 일본의 고대 역사서 <속일본기>에 나옵니다. 그는 사절단으로 666년 일본에 왔다가 2년 후 고국이 망하자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국땅에 뿌리내린 高句麗의 후예는 高麗라는 국호를 성씨로 삼았다. 일본에선 高句麗를 高麗로 표기하고 '고마'라고 읽는다.
간무 천황의 어머니인 화씨부인(다카노 니이가사·?~789년)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화씨부인의 아버지는 왜(당시 일본은 왜·야마토로 불렸음) 왕실에서 백제조신이라는 벼슬을 지낸 화을계(야마토노 오토쓰구)로 그는 백제 무령왕(501~523년)의 직계 후손이다. 즉 무령왕이 아들 순타태자를 일본으로 파견했는데 일본에서는 사아군으로 불렸으며 그 아들이 법사군이고, 화씨부인은 그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일 사학계가 대체로 인정하는 바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해로를 통해 비류백제를 기습공격하자 왕이 왕족과 신하를 거느리고 바다 건너 왜로 달아나 일본의 15대 왕 오진(應神)이 됐다고 말한다. 비류가 일본 천황의 시조라는 설은 1993년 ‘고대천황도래사’를 펴낸 와타나베 미츠토시도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일본서기’ 중 비다쓰 천황(30대)기 572년 10월에 백제대정(百濟大井·백제 귀족의 집단거주지)에 백제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대정은 35대 고교쿠 천황 시대까지도 존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1182성씨의 계보와 유래를 기록한 ‘신찬성씨록’(815년)에도 비다쓰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일본서기’ 중 덴치 천황(38대)기에는 백제의 마지막 보루인 주유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후 국인(國人)들이 이렇게 한탄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9월7일 백제의 주유성이 처음으로 당에 항복하였다. 이때 국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주유성이 떨어졌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조상의 묘소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여기서 ‘국인’은 누구인가. 백제에서 건너와 일본에 왕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백제가 망하자 돌아갈 고향을 잃었다고 통곡하는 대목이라고 해석했다. 또 ‘일본서기’에는 641년 죠메이 천황(34대)이 백제궁에서 세상을 뜨자 16세의 동궁(후에 덴치 천황)이 궁 북쪽에 빈소를 설치하고 이를 ‘백제대빈’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죠메이 천황이 백제인임이 확실하면 그의 아들 덴치(38대), 덴치의 동생 덴무(40대), 덴치의 둘째 딸 지토(41대) 천황까지 모두 백제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거슬러 올라가면 게이타이 천황(26대)부터 고토쿠(36대) 천황까지 혈연관계상 모두 백제인이다.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동족”
게이타이 천황(26대)과 백제 무령왕이 친형제간이며, 긴메이 천황(29대)은 백제의 성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새로운 설도 내놓았다. 긴메이 천황이 백제의 성왕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 고대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의 주장을 이어받은 것이다. 고바야시는 그의 저서 ‘두 얼굴의 대왕’에서 “성왕 18년(540년)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전한 성왕이 즉각 왜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왜국의 가나사시노미야를 거처로 삼고 왜국 왕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중 ‘백제본기’를 보면 백제 성왕이 540년 패한 것은 사실이나 왜국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하나의 설에 불과하다.
홍교수는 왜국과 백제를 넘나드는 복잡한 왕실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백제의 개로왕, 개로왕의 차남 곤지왕자(곤지왕자의 형이 문주왕)가 일찍이 왜국으로 건너갔는데 그의 장남인 모대왕자는 다시 백제로 돌아와 24대 동성왕이 되었다(문주왕이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조카가 왕위를 계승했다). 백제에서는 동성왕(모대왕자)의 차남 사마가 25대 무령왕이 됐고, 일본에서는 동성왕의 3남 오호도가 후사가 없는 부레쓰 천황(25대)의 뒤를 이어 게이타이 천황(26대)이 되었다는 것. 이 가계도대로라면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은 친형제다.
무령왕이 503년 게이타이 천황에게 보낸 청동거울 ‘인물화상경’(일본 국보 제2호)에 새겨진 글씨에서 근거를 찾는다. 이 청동거울에는 “계미년 8월10일 일십대왕 시대에 남제왕(남동생이라는 의미로 게이타이 천황을 가리킴)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의 이름)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여…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사실 이 거울의 비밀을 제일 먼저 파헤친 것은 원광대 소진철 교수였다. 소교수는 ‘금석문으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에서 이 거울이 백제 무령왕이 동생의 나라 왜왕을 승인하는 일종의 신임장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