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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luk(맘루크)

또랑i 2018. 5. 29. 19:57

영어로 Mamluk(맘루크) 또는 Mameluk(마멜룩), 아랍어로는 مملوك(맘루크, mamlūk), 복수형은 مماليك(마말리크, mamālīk).

 

이른바 이슬람교로 개종한 노예 병사로 알려진 부대로, 맘루크는 소유된 자를 뜻한다. 비슷한 뜻의 굴람(غلام, Ghulam)이라고도 불린다. 맘루크는 주로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 지방에서 쓰이고, 굴람은 이란 너머 중앙아시아쪽에서 쓰이는 표현이지만 사실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운편이다.

 

중동계 기병이라는 점에서 알수있듯이 전형적인 후기의 중장기병에 해당된다.

 

중앙아시아, 기타 지방에서 끌려온 노예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군사 훈련을 시켜 맘루크로 육성했다. 9세기 경 압바스 왕조의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튀르크인 용병들을 대거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 맘루크의 시초이며, 그 이후로도 맘루크 중 상당수가 튀르크인이었다. 이 튀르크인들은 자신들을 고용하고 훈련시킨 고용주 외에는 아랍-이슬람 제국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자력으로 높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없는 신분이었고, 따라서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충성심 높은 군인으로서 아랍 군주들에게 각광받았다. 튀르크인 이외에도 슬라브인도 많았다고 하며, 이때문에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에티오피아의 흑인 기사(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였다)와 이슬람 제국의 백인 맘루크가 싸우는 진풍경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흑인과 백인을 구분하여 백인 노예병은 맘루크, 흑인 노예병은 아브드라고 불렀다.

 

기사와 함께 여러모로 중세 최강의 무력집단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부대. 수습생들은 전사로 인정받기 위해 마술, 창술, 검술, 궁술 4가지를 완벽하게 체득해야 했으며 이 중 하나라도 결점이 보이면 전사가 될 수 없었다. 특히 기마궁술은 여러 자세에서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도록 훈련받은 덕에 방향을 바꾸거나 활의 반대편에 있는 적도 몸을 비틀어 쏠 수 있었다. 물론 백병전 능력도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십자군과 몽골군이라는 당대 최강의 강적들을 모두 격파한 위엄쩌는 군대다. 그리고 싸움만 잘하는 무식한 전사들이 아니라 전사들은 기본적인 전술 정도는 숙지를 해야되고, 고위 장교들은 전략도 요구받아서 당대 이슬람 국가들의 참모나 책사, 공무원으로 종사를 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티모시 메이는 이들을 "현대로 치자면 네이비 씰이나 그린베레같은 존재들이다"라고 평했다. 물론 맘루크라고 무적은 아니어서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한테는 발렸는데, 1516년의 마르지 다비크 전투에서 8만의 맘루크군 가운데 90%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일이 있다. 당시 오스만군은 모두 합하여 65. 다만 이것은 군사의 기량이라기보다 화약 무기 대 기병이라는 무기 체계 때문이었으며, 예니체리를 뽑는 데브시르메 제도 자체가 맘루크 선발 과정에서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리즈 시절인 13세기에도 호라즘의 굴람이 칭기스 칸에게 털린 적도 있다.

 

13세기 이슬람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부패, 권력집단화되거나 지방에 할거하는 군벌스러운 세력이 되었다. 그러다가 아예 나라를 세우고 지배층이 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는 북인도의 델리 술탄 왕조와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맘루크 왕조가 유명하다.

 

이후 몽골이 시나이 반도까지 쳐들어 온 아인잘루트 전투 당시에는 몽골군을 쳐부수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본래 몽골은 러시아로 쳐들어가면서 벌이가 시원치 않아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먹었는데, 이때 팔려간 노예들이 맘루크가 되어 몽골군과의 전투경험을 살려서 후일 쳐들어온 몽골군을 상대로 잘 싸웠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맘루크의 구성원은 대부분 투르크족이었다. 러시아에서 유입된 인원들도 거의 킵차크 투르크족 출신의 전직 용병들이었지 슬라브인은 적었다. 위와 같은 이야기가 퍼진 계기는 5대 술탄이자 전쟁영웅인 바이바르스 때문으로, 그가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 노예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크림 반도 출신의 투르크계 킵차크인이었다.

 

맘루크 왕조는 약 250년 간 존속되었지만, 군주의 권한이 약하다보니 평균 군주 지배기간이 7년이라 할 정도로 암살이 빈번했다.

 

왕국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에 병합당했으나 맘루크들은 오스만 치하에서도 기득권을 계속 유지해 갔다. 18세기 말엽까지 bey, 즉 총독으로써 이집트를 중심한 아라비아 반도의 군벌로 잔재했는데, 이 때의 맘루크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투능력과 전술을 갖춘 집단으로 이집트 원정을 온 프랑스의 코르시카 출신 시골뜨기 황제한테 귓밥도 안되고 발렸다. 하지만 이들을 이끈 무함마드 베이는 포기하지 않고 영국과 손잡아서 공격하면서 프랑스를 곤란하게 만들었기에 이들의 용맹성이 인상이 깊었는지 나폴레옹은 자신을 따라 프랑스로 온 소수의 맘루크에 프랑스 출신 기병을 모아서 맘루크 근위대를 만들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국내에서 벌어진 반발로 인하여 부랴부랴 프랑스로 가고 남은 프랑스군은 2년 가까이 저항했지만 오스만, 맘루크, 영국군 공격에 휘말리고 덤으로 페스트까지 발병하면서 줄줄이 죽어나가 결국 전군이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이 패배로 로제타 석은 영국이 꿀꺽했다. 맘루크는 이 틈을 타 독립을 선포해 맞서 싸웠으나 19세기 초 이집트 총독인 무함마드 알리의 중재로 이집트가 독립을 얻어낼 때 무람마드 알리의 아들 츨장식에 초대한다고 맘루크들을 죄다 초대한 다음에 대학살했고, 심지어 그 자리를 피한 맘루크들까지 추적해서 모조리 잡아죽이면서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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