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인민경제에 실패한 김정은 “자책한다”

또랑i 2018. 4. 26. 15:55
① 핵 야망과 체제 생존 사이 고민

두 얼굴의 사나이가 온다. 사흘 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 마주한다. 북한 핵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비롯한 민족의 명운이 걸린 현안을 숙의할 담판이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한반도의 절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절대 권력을 세습받아 벌써 집권 7년차다. 하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서울 핵 불바다와 워싱턴 타격으로 겁박하던 그의 얼굴이 생생한데, 올리브 가지를 흔들며 평화와 비핵화를 설파하는 최근 유연한 승부사의 모습은 어색하다. 엇갈리는 정보와 판단은 오히려 혼돈스럽기까지 하다. ‘야누스(Janus)의 지도자’ 김정은을 해부해 본다. 
  

김정은을 말하다

2010년 9월 28일 평양 대성구역 금수산태양궁전 광장. 국가주석 김일성(1994년 심근경색으로 사망)의 시신이 안치된 대리석 건물 앞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수백 명 규모의 노동당과 군부 간부진이 도열했다. 노동당 전원회의 참가자를 위한 기념촬영 자리다. 김정일의 오른편으로 이영호 총참모장이 자리했고, 왼쪽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앉았다. 눈길을 끈 것은 이영호 바로 옆에 두 손을 가지런히 한 채 자리 잡은 인민복 차림의 청년이었다. 당시 나이 26세. 베일에 싸였던 후계자 김정은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낸 순간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관련기사

김정은의 전격적인 권력 무대 등장은 충격을 던졌다. 북한이 김일성과 김정일에 이어 3대 세습을 강행할 것인가는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남측 인사들에게 “내 대(代)에서까지 그게 가능하겠냐”며 연막을 피웠다.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2009년 10월 외신 인터뷰에서 “현 시점에서 후계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북한은 김일성 일가를 의미하는 소위 ‘백두혈통’ 논리를 띄우며 ‘혁명 계승’의 비밀작업을 착착 진행시켰다. 김정은 찬양 가요인 ‘발걸음’이 보급됐고 ‘청년대장 김정은’을 찬양하는 선전포스터와 벽화가 등장했다. 2008년 여름 뇌졸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김정일은 막내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최종 낙점했고 자신만의 통치 노하우를 현장학습을 통해 물려줬다. “믿을 건 핏줄뿐”이란 생각이 작용한 듯하다. 김정일이 2011년 12월 숨지자 김정은은 절대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김정은식 통치는 말 그대로 질풍노도였다. 말의 성찬이었고, 진단은 있지만 처방은 따르지 않는 국면이 이어졌다. 속성과외식으로 익힌 리더십은 미숙한 정책과 시행착오를 낳았다.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그는 “다시는 우리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온몸을 좌우로 흔들며 어색해하던 그의 언급은 미덥지 않았다. 결국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파탄난 민생은 도돌이표를 찍고 있다. 
  
김정은 시대의 전략노선으로 2013년 3월 야심차게 제기한 ‘경제·핵 병진’ 정책은 불과 5년여 만인 지난 20일 운명을 다했다. 김정은이 이날 당 7기 3차 전원회의에서 병진노선의 위대한 승리를 선언했다는 게 노동신문의 보도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초 핵보유로 여력이 생긴 국방비를 민생에 돌리겠다는 병진노선의 구상은 헝클어졌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자초했고 북한 경제는 중국이란 산소호흡기마저 떼인 채 질식상태에 빠졌다. 
  
간부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강등·해임은 ‘독재권력의 잔혹한 지도자’란 인식을 안팎에 심어줬다. 전현준 동북아평화연구원장은 “김정은 위원장은 존경받지 못한 바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돼라는 마키아벨리식 통치술을 그대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했다”고 분석했다.   
  
집권 이듬해인 2013년 12월 이뤄진 고모부 장성택에 대한 ‘반국가 혐의’ 처형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친인척도 무참히 살해하는 인물이란 부정적 이미지를 남겼다. 지난해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이복형 김정남이 독극물 테러로 살해당했던 게 김정은의 지시에 따른 북한 공작원 소행으로 지목된 것도 마찬가지다. 
  
극도의 호전성을 보여준 김정은의 대남 위협·도발은 우리 국민의 부정적 인식을 부채질했다. 그는 핵을 내세워 공공연히 ‘서울 불바다’를 위협했다. 대남 특수부대의 청와대 타격훈련까지 벌여놓고 “남조선의 사등뼈(척추)를 부러뜨리고 타고 앉으라”고 독려했다. 후계자 시절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을 주도했다는 분석도 있다. 김정일이 과거 후계 시기 아웅산 테러나 대한항공기 폭파를 자행한 것과 유사한 행보다.   
  
지난 1월 신년사를 계기로 평창올림픽 참가와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까지 치닫고 있는데도 김정은의 유화 제스처에 대해 찜찜하다거나 믿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이런 과거 행태 때문이다.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차장은 “남한에서 보수정권이 무너지는 등 북측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됐다는 판단에 따라 위장 평화공세에 나선 것”이라며 지난해 말까지 드러내 온 도발적이고 잔혹한 이미지가 김정은의 본 모습에 가까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정은의 과거 행태에 집착하기보다 변화된 태도와 정책노선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통일부 당국자는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긴 김정은 위원장은 이미 호랑이 등에 탄 모양새”라며 “그 조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언적이나마 경제·핵 병진노선에 대해 사실상 포기를 선언하는 등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 대목도 분명하다는 얘기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개인의 성향보다는 정치인으로서 김정은이 누구인지에 방점을 두는 게 그의 리더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더십을 발휘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김정은 역시 조성된 정세에 맞춰 변신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출처: 중앙일보] 잔혹한 지도자, 유연한 승부사 … 김정은의 두 얼굴





② 후계 권력 장악한 로열패밀리 막내 

김정은의 출생 스토리는 비밀에 싸여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생모 고용희 사이에서 1984년 태어났다는 정도만 확인됐다. 고용희는 북송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다. 제주 출신인 그녀는 아버지 고경택을 따라 일제시대 오사카로 건너갔고, 1960년대 북송선을 탔다.   
  

김정은을 말하다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과 동거하던 김정일이 어떻게 고용희와 인연을 맺었는지도 베일 속에 있다. 북송선이 도착한 곳이 강원도 원산이라 고용희가 평양 권력 내에서 한때 ‘원산댁’으로 불렸다는 전언도 있다. 김정은이 원산 인근에 마식령스키장을 짓는 등 관광지구 개발에 공을 들이고 친형 정철, 여동생 여정(노동당 제1부부장)과 함께 원산의 전용 별장에 자주 들르는 게 원산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란 관측이 나온다. 
  
북한은 김정은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 공식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집권 7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제대로 된 사진이나 기록 영상은 없다.   
  
고용희, 북송선 도착한 곳이 원산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관련기사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10대 시절인 1990년대 후반 스위스에서 유학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우상화를 위한 공백기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기 북한에서 대규모 집단 아사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최고지도자의 서방 유학을 내세우긴 어려울 것이란 얘기다.   
  
생모 고용희를 ‘존경하는 어머니’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2002년께 감지됐지만 곧 중단됐다. 고용희의 부친이 일본 군수공장에서 간부로 일한 경력 등이 조총련 등의 입을 통해 북한 내부로 알려질 경우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란 분석이다. 
  
이런 상황은 백두산 출생설을 만들어 이른바 ‘백두혈통’ 신화를 조작한 김정일 때와 다르다. 1941년 브야츠크 병영에서 소련군 장교 김일성의 아들로 태어난 김정일을 북한은 ‘1942년 백두산 탄생’으로 선전했다. 유년기 사진과 김일성대학 시기의 군사훈련 영상, 1964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김일성을 따라다니던 모습 등이 북한 관영TV를 통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김정일 “형 정철이는 착해서 안돼”  
  
김정은의 성장 과정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건 1998년 여름이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뇌졸중으로 몇 달간 공개활동을 중단했다. 포스트 김정일 체제에 이목이 집중됐고, 3대 세습을 강행할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정철·여정과 함께 한 스위스 유학생활에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졌다. 유학생활 중 김정은은 두각을 나타내거나 우수한 자질을 보이지는 못했다는 게 교사·학생의 전언이다.   
  
급우인 미카엘로는 “김정은은 컴퓨터 게임과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 액션영화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경쟁에서 지는 걸 무척 싫어했다”고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커트 캠벨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2013년 12월 장성택 처형 직후 CNN 인터뷰에서 “김정은의 성격을 파악하려고 미 당국이 스위스 유학 당시 김정은의 친구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했으며 김정은을 ‘매우 위험하고 폭력적이며 과대망상증을 보이는 인물’로 결론내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김정일이 막내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낙점한 건 뜻밖이었다. 부자세습 강행 시 무엇보다 봉건왕조 시기의 장자 계승 원칙을 따를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성혜림과의 사이에 태어난 장남 김정남은 일찌감치 눈 밖에 났다.   
  
김정남은 한 언론인과의 메일에서 "서방 유학을 통해 자본주의에 물든 나를 보며 아버지는 못마땅해하셨다”고 밝혔다. 차남 김정철의 경우 호르몬계 질환으로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나타나고 가슴이 불거지는 등 문제가 생겨 낙마했다. 결국 김정일은 사망 1년여 전인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를 통해 26세의 막내 김정은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유학 때 동창 “김정은, 지기 싫어해”  
  
김정은이 후계권력을 따낸 게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선대 수령인 김일성·김정일의 기질과 외모를 닮은 점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알려진 후지모토 겐지는 "내가 본 ‘정은 왕자’(김정은을 지칭)는 지도자가 될 성품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편을 나눠 농구경기를 할 경우 정철은 종료 후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진 반면, 김정은은 반드시 ‘총화’(결산 모임)를 했다는 것이다. 잘잘못을 따지고 다음부터 어떻게 하라는 독촉이 쏟아졌다. 이 모습에 김정일 위원장은 "정철이는 너무 착해서 못쓴다. 나를 가장 빼닮은 건 정은”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계 지위를 차지한 김정은은 권력 유지에 누구보다 냉혹함을 보였다. 한때 후계경쟁 관계였던 김정남을 독살한 건 후환을 없애겠다는 심산으로 보인다. 김정은 체제 유고 시 중국 지도부가 ‘백두혈통’의 장남인 김정남을 옹립할 것이란 서방 언론의 관측이 김정은을 자극했을 수 있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원장은 "아버지가 후견인으로 낙점해 준 고모부 장성택을 무참히 살해한 것도 결국 권력 장악을 위한 본보기식 숙청”이라고 말했다. 
  
권력 위해 맏형 정남·고모부 제거  
  
집권 초기 체제 붕괴론이 들끓었지만 한·미 당국은 "예상보다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핵과 미사일 도발 카드에 이어 체제 생존 차원의 전술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과거 미국을 골탕먹인 얕은 수로는 노회한 비즈니스맨 트럼프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게 김정은의 고민거리다.   
  
대남 위협에 싸늘해진 국민 여론을 정상회담 이벤트나 ‘비핵화’ 제스처만으로 돌려세우는 것도 쉽지 않다. 
  
이틀 뒤 판문점 정상회담은 김정은에게 허용된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핵을 머리에 이고서는 권력 유지와 체제 생존이 불가능하다. 김정은이 5년 전 야심차게 내걸었던 경제·핵 병진노선의 간판을 지난주 떼낸 건 그 증표다. 정상회담 테이블이 개과천선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언약의 무대’가 돼야 하는 이유다. 

[출처: 중앙일보] [단독] ‘원산댁’ 아들 정은, 형들 제친 건 남다른 승부욕



③ 문제는 민생, 개혁·개방 할 수 있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월 평양 뉴타운인 여명거리 건설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2016년 4월 착공돼 1년 만에 완공한 이곳엔 70층짜리주상복합 아파트를 비롯해 44개 동, 4804가구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월 평양 뉴타운인 여명거리 건설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2016년 4월 착공돼 1년 만에 완공한 이곳엔 70층짜리주상복합 아파트를 비롯해 44개 동, 4804가구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연합뉴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거머쥔 북한 김정은(34) 국무위원장이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만성적인 경제난이다. 2012년 집권 이후 한때 경제 지표가 호전되고, 미약하게나마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돌파구를 마련하진 못했다. 이런 점을 간파한 때문인지 김정은은 유독 경제문제만큼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수입병(외제 선호)에 걸렸다”거나 “관료주의·형식주의와 타성에 젖었다”고 경제 관료를 공개 질타하는 모습 등이 드러난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진단만 내릴 뿐 처방은 없었다. 자신감의 결여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정은을 말하다

경제 분야에 대한 김정은의 트라우마는 화폐개혁에서 촉발됐다. 후계자 시절이던 2009년 11월 말 북한은 17년 만의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화폐가치를 100대 1로 낮추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 절하)이 핵심이다. 교환할 수 있는 금액을 제한해 장롱 속 화폐를 끌어내려는 의도였다. 1990년대 말 대량 아사 사태인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붕괴된 공식 배급망을 복원하고, 시장 역할을 축소하려는 뜻도 담겼다. 노동자의 월급을 현실화(북한 화폐로 평균 3000원 선)하는 조치도 취했다. 
  
그렇지만 물가가 폭등하고 식량과 생필품이 부족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장마당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일명 ‘돈주(錢主)’ 세력의 반발도 거셌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화폐개혁이 성공했다면 노동당 선전담당 부서는 후계자 시절 김정은의 경제 리더십을 부각할 호재로 삼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심 찬 개혁 추진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민심을 누그러뜨릴 희생양이 필요했다.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 책임을 덮어쓰고 이듬해 봄 처형됐다. 
  

김정은 경제관련 언급

김정은 경제관련 언급

집권 직후 김정은은 ‘인민경제’를 챙기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그는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해 6월엔 6·28조치로 불리는 경제관리 개선 방안도 내놓았다. 실적이나 초과생산에 따라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생산성을 높이자는 취지다. 협동농장이나 공장·기업소에서 시범실시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진 못했다. 경제 인프라가 열악한 데다 제한적인 개혁 조치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김정은 정권 들어 처음으로 3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대북제재의 그늘이 본격화한 것도 발을 묶었다. 
  
그해 3월 김정은은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경제 건설과 핵 개발을 함께 추진한다는 ‘경제·핵 병진노선’을 공식화했다. 핵무기 보유로 인해 재래식무기 구입 같은 군사비 투입이 줄게 됐으니 이를 민생에 돌리겠다는 논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에 문책성 해임을 당한 경제통 박봉주 총리를 6년 만인 2013년 4월 복귀시킨 것도 파국에 이른 경제에 대한 부담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직접 챙기기보다는 ‘경제는 박봉주에게’란 의미의 포석을 보여줬다. 
  
하지만 근본적 해결책이 없는 북한 경제는 여태껏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핵과 미사일이 자초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직격탄이 됐다. 지난해 신년사를 통해 김정은은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주민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던 말이 공수표가 된 데 따른 민심 수습책이었다. 
  
김정은의 경제 해법이 먹혀들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 경제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듯하다고 지적한다. 스위스 유학 등 10대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데다 절대권력의 잠재적 후계자군에 포함돼 일반 주민과 차단된 생활을 했기 때문이란 얘기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연구서 『김정은 리더십 연구』(2017, 세종연구소)에서 “김정은은 15세였을 때 후지모토 겐지(김정일의 요리사로 알려진 일본인)에게 ‘외국의 백화점이나 상점에 가보니 어디를 가나 식품들로 넘쳐나서 놀랐어. 우리나라 상점은 어떨까’라고 묻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스위스 유학에서 귀국한 후인 2001년 3월(당시 17세)에는 후지모토에게 “우리는 매일 말도 타고 롤러블레이드도 타며 농구도 하고, 또 여름에는 제트스키를 하고 수영장에서 놀기도 하는데 일반 인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며 궁금함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결국 북한 경제의 실상을 무시한 과시성 건축·건설로 이어졌다. 평양에 70층 주상복합빌딩을 비롯한 고층 건물이 줄지어 들어섰고, 뉴타운 형태의 개발이 벌어졌다. 승마구락부와 골프장, 문수 물놀이장이 만들어졌고, 강원도 문천에는 12개 슬로프를 갖춘 마식령스키장이 문을 열었다. 수억 달러를 들여 평양에서 20㎞ 정도 떨어진 순안공항의 리모델링을 마친 김정은은 “평양까지 고속철을 놓으면 좋겠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대부분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 당시 경험한 세계적 워터파크인 알파마레(Alpamare)와 고속철 테제베(TGV)를 본뜬 것이란 평가다. 
  
집권 첫해 김정은은 국제사회를 향해 개혁·개방의 시그널을 띄웠다. 미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미키마우스를 비롯한 디즈니 캐릭터가 등장하는 공연을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고, 평양 중심가에 서구형 카페를 만들어 부인 이설주와 팝콘을 먹는 장면을 관영매체로 내보냈다. 서방 외교가에선 해외유학파인 김정은의 경우 할아버지·아버지와 다를 것이라면서 기대를 보였다. 하지만 식량·에너지·달러 부족이란 삼각파도에 김정은의 경제구상은 휩쓸리고 말았다. 지난 2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직접 경제·핵 병진노선 종식을 선언하고 “당과 국가의 전반사업에서 경제사업을 우선시하겠다”고 밝힌 건 노선 수정이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경제 문제는 일단 후순위로 밀렸다. 북핵이란 긴급 의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한국과 국제사회의 일치된 목소리가 반영된 것이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에 김정은이 확답하지 않고서는 북한 경제 회생을 기대할 수 없다. 비핵화 솔루션에선 ‘선핵후경(先核後經)’이 답이란 얘기다.  

[출처: 중앙일보] 인민경제에 실패한 김정은 “자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