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三田渡에서 겪은 '적폐 청산'의 파국
또랑i
2017. 10. 16. 16:35
삼전도 같은 역사적 치욕 사례 어느 나라에나 숱하게 있어
자기 비하·적개심은 도움 안 돼… 실패로부터 배우는 자세 갖길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은 380년이 지난 옛일이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피를 끓게 하는 사건이다. 추석 연휴 때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이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것만 봐도 그렇다. 높다란 단(壇) 위에 앉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조아린 끝에 이마에 허연 흙자국이 묻어 있는 인조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만주족의 신흥 청나라가 명 제국을 압박하던 격변기에 조선이 수난을 겪은 것은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 체험을 절대화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인가 싶다. 지나친 자기 비하나 적개심만 불러일으켜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제의 나라'를 칭한 중국 역사를 대충 훑어봐도 이보다 심한 치욕의 역사가 수두룩하다. 4세기 서진(西晋) 3대 황제 회제가 흉노에게 수도 낙양이 포위된 끝에 처형된 '영가(永嘉)의 난'이나 1449년 명나라 정통제가 몽골을 토벌하러 갔다가 붙잡힌 '토목(土木)의 변' 같은 사건이 그렇다.
송나라 때인 1127년 '정강(靖康)의 변'도 삼전도의 치욕을 능가하는 사건이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군대의 공세에 밀려 송의 휘종은 아들 흠종에게 양위까지 했지만 파멸을 막을 수 없었다. 수도 개봉(開封)의 성문을 열고 항복한 흠종과 휘종은 평민으로 강등됐고 1만5000여 명의 화가와 음악가 등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 소달구지에 실려 흑룡강성 북쪽 오지까지 끌려간 휘종과 흠종은 금의 태조 신위 앞에 절하도록 강요당했고, 각각 '혼덕공(昏德公)', '중혼후(重昏侯)'란 별명까지 얻었다. '덕을 혼미하게 한 제후' '갑절로 혼미한 제후'라는 모멸적인 칭호였다.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수만 명의 포로가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고, 이역에서 눈을 감았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만주족의 신흥 청나라가 명 제국을 압박하던 격변기에 조선이 수난을 겪은 것은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 체험을 절대화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인가 싶다. 지나친 자기 비하나 적개심만 불러일으켜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제의 나라'를 칭한 중국 역사를 대충 훑어봐도 이보다 심한 치욕의 역사가 수두룩하다. 4세기 서진(西晋) 3대 황제 회제가 흉노에게 수도 낙양이 포위된 끝에 처형된 '영가(永嘉)의 난'이나 1449년 명나라 정통제가 몽골을 토벌하러 갔다가 붙잡힌 '토목(土木)의 변' 같은 사건이 그렇다.
송나라 때인 1127년 '정강(靖康)의 변'도 삼전도의 치욕을 능가하는 사건이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군대의 공세에 밀려 송의 휘종은 아들 흠종에게 양위까지 했지만 파멸을 막을 수 없었다. 수도 개봉(開封)의 성문을 열고 항복한 흠종과 휘종은 평민으로 강등됐고 1만5000여 명의 화가와 음악가 등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 소달구지에 실려 흑룡강성 북쪽 오지까지 끌려간 휘종과 흠종은 금의 태조 신위 앞에 절하도록 강요당했고, 각각 '혼덕공(昏德公)', '중혼후(重昏侯)'란 별명까지 얻었다. '덕을 혼미하게 한 제후' '갑절로 혼미한 제후'라는 모멸적인 칭호였다.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수만 명의 포로가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고, 이역에서 눈을 감았다.

명청 교체기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의 살길이 전쟁이었는지 강화(講和)였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조선은 신흥 제국 청의 침략을 물리칠 만한 역량이 없었고, 명과 청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처지도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명·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 사례를 들기도 하지만, 그때야 후금의 누르하치 세력이 막 발돋움하던 시기였기에 조선에 군사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홍타이지가 1636년 청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 이후엔 20년 전 광해군 때와는 국제 정세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목해야 할까. 한명기 교수는 역사평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전쟁 대비와 수행에 무능했던 반정 공신들을 끝까지 편애하고, 국방 대책과 민생 안정을 내세웠으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 실천은 소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권 안보에만 급급하다가 국가 안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조는 집권 직후 명나라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광해군이 1619년 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군의 투항을 지시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후금 원정을 망쳤다고 성토했다. 전(前) 정권의 '적폐'를 부각시켜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명나라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여야 정치인들이 영화 '남한산성'을 놓고 정치적 셈법에 따라 각각 다른 관전평을 내놓았다는 얘기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여권 정치인들은 병자호란의 원인으로 '외교력 부족'을 앞세워 북핵 위기에 대한 외교적 해결을 강조한 반면, 야권에선 '군주의 무능'을 내세워 현 정권의 안보 무능을 비판했다. 주화파(主和派) 최명길과 주전파(主戰派) 김상헌은 입장이 달랐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진심은 서로 이해하는 사이로 영화에서 그렸다. 지금의 정치판은 상대방을 적폐로 몰아 서로 손가락질하기에만 바쁘다. 삼전도에서 겪은 '적폐 청산'의 파국을 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같아 불안할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목해야 할까. 한명기 교수는 역사평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전쟁 대비와 수행에 무능했던 반정 공신들을 끝까지 편애하고, 국방 대책과 민생 안정을 내세웠으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 실천은 소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권 안보에만 급급하다가 국가 안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조는 집권 직후 명나라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광해군이 1619년 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군의 투항을 지시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후금 원정을 망쳤다고 성토했다. 전(前) 정권의 '적폐'를 부각시켜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명나라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여야 정치인들이 영화 '남한산성'을 놓고 정치적 셈법에 따라 각각 다른 관전평을 내놓았다는 얘기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여권 정치인들은 병자호란의 원인으로 '외교력 부족'을 앞세워 북핵 위기에 대한 외교적 해결을 강조한 반면, 야권에선 '군주의 무능'을 내세워 현 정권의 안보 무능을 비판했다. 주화파(主和派) 최명길과 주전파(主戰派) 김상헌은 입장이 달랐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진심은 서로 이해하는 사이로 영화에서 그렸다. 지금의 정치판은 상대방을 적폐로 몰아 서로 손가락질하기에만 바쁘다. 삼전도에서 겪은 '적폐 청산'의 파국을 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같아 불안할 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15/20171015020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