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 의료비 '블랙홀'에 갇힌 일본 개호보험금(치료·돌봄 서비스) 눈덩이..대기업 건보마저 '휘청'
일본 가고시마현에 사는 다지마 나비 할머니(117)는 지난 9월 18일 특별한 경로의 날을 맞았다. 117세로 세계 최고령자던 자메이카의 바이올렛 브라운 할머니가 지난 9월 초 사망하면서 그보다 생일이 5개월 늦은 다지마 할머니가 타이틀을 물려받았다. 할머니는 규슈의 최남단인 가고시마현에서도 340㎞ 떨어진, 기카이섬에서 산다. 이날 기카이섬엔 가고시마현 지사까지 할머니를 찾아오는 등 잔치 분위기 속에서 하루가 지났지만 정작 ‘장수국가’ 일본의 고민은 커지고 있다.
일본 총무성 통계에 따르면 일본 내 100세 이상 인구는 6만7824명이다. 지난해보다 2132명이나 늘었다. 1971년만 해도 339명에 불과하던 100세 이상 인구가 47년 연속 늘면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100세 넘는 일본 인구 사상 최대
의료비 35%가 75세 이상 노인에
고령인구를 대하는 사회 태도도 바뀌고 있다. 1960년대만 해도 100세를 넘기면 대단한 일이라 여겨 일본 후생노동성이 이들에게 훈장과 함께 은접시를 선물로 보냈다. 하지만 지난해 “쓸데없이 세금만 낭비한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올해부턴 접시 소재를 합금으로 바꿨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인 일본이 ‘100세 노인’을 마냥 반기기엔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이 정도는 애교다. 일본의 가장 큰 고민은 치료와 돌봄(개호) 등 의료비다.
일본 후생노동백서에 따르면 가장 최근 통계인 2014년만 보더라도 전체 의료비 40조8000억엔(약 413조원) 중 35.6%인 14조5000억엔이 75세 이상 노인 관련 비용이다. 고령자가 워낙 많다 보니 75세 이상 인구는 ‘후기 고령자’로 분류한다. 전체 의료비는 전년 대비 1.8% 증가했으나 후기 고령자 의료비는 2.3% 늘었다. 65~74세 ‘전기 고령자’ 인구도 올해 3514만명을 넘어섰다. 캐나다 인구(3629만명)에 맞먹는 숫자다.
나가는 비용이 늘어난다면 어딘가에선 들어오는 돈도 늘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08년 ‘후기 고령자 보험’을 신설해 75세 이상은 치료비의 10%는 부담토록 했다. 당시 젊은 세대도 부담을 나눠 지자며 모든 보험 가입자가 ‘후기 고령자 의료비 분담금’을 내도록 했다. 취지는 좋았지만 당시엔 이게 얼마나 불어날지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직장 건강보험이 대기업(가입자 약 2900만명), 중소기업(3600만명), 공무원(900만명) 등으로 나뉜다. 여기에 가입하지 못한 일본 국민 3500만명은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돼 있다.
그러나 일본에선 가장 건전해야 할 대기업 건보마저 곪아가고 있다. 1300여개 대기업 건강보험 조합 중 1000개가 올해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늘어나는 고령자 의료비 부담을 조금씩 조금씩 대기업 건보에 전가시켰기 때문이다. 기업만 문제가 아니다. 2014년 기준으로 후기 고령자 의료비인 14조5000억엔 중 75세 이상이 부담한 비용은 본인 부담 10%와 후기 고령자 보험 10%, 총 20%다. 40%를 74세 이하가 부담했고 나머지 40%는 정부와 지자체가 냈다. 정부도 가뜩이나 비용 부담이 느는 상태에서 적자가 누적되는 대기업 조합 해산까지 겹치면서 부담은 배로 늘어났다. 대기업 조합이 없어지면 조합원들은 국민건보 혹은 중소기업협회 건보에 가입하게 된다. 양쪽 모두 정부가 일정 부분 부담을 지는 식이다.
일본 정부에서도 제도 개선에 나섰다. 당장 내년부터 국민보험의 운영 주체를 기초지자체에서 광역지차체로 바꾼다. 가입자 숫자를 늘리고 재원 규모를 키우겠다는 취지. 돌려 말하면 대상 지역을 넓혀 늘어나는 노인 의료 비용을 감당할 젊은 층의 숫자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노령층에 대한 의료 지원 체제를 손보는 것임을 일본 사회도 안다. 그러나 노령층의 표를 생각하면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노령층의 급격한 증가와 이들에 대한 지원 확대 논의가 시작된 한국에서 재원 마련을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일본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도쿄 = 정욱 특파원 wook@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