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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칼럼] 한국, 사회계약을 다시 써야 한다

또랑i 2011. 5. 10. 14:05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한나라당의 강행으로 한·EU FTA가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후진국인 한국이 미국이나 EU 등 선진국과 자유무역을 하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고급 산업의 개발이 어려워지므로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발전에 해롭다는 필자의 입장은 지난 1월 칼럼을 통해서 피력한 바 있으므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협정이 설사 우리나라 전체에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농업·축산업·수산업·소매업 그리고 상당수의 제조업 분야가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정부도 이를 인정하여 농업·축산업· 수산업과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보상제도를 마련하였지만 예상 피해자들은 보상책이 불충분함을 호소한다.

 

농민들의 경우에는 한·EU FTA, 또는 한·미 FTA 같은 대외협정이 갈등의 주된 근원이지만, 유통업의 경우에는 국내적 규제완화가 더 큰 문제이다. 대기업들이 계속해서 대형마트를 확장해 나가고 있고, 얼마 전 '통큰 치킨' 사건에서 보았듯이 소상인들이 밀집되어 있는 업계에 진출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지금 치킨집이나 피자집 운영자 등 많은 소매상들은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 당하고 퇴직금을 가지고 마지막 재기를 노려보던 사람들이라, 그들의 상황은 더 절박하다.

 

어느 나라에서건 모든 정책의 변화가 승자와 패자를 낳고 따라서 갈등을 일으키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만큼 그런 갈등이 심한 경우는 많지 않다. 이는 과거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던 암묵적인 사회계약이 깨져가고는 있는데 그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계약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3국은 시장규제와 보호무역을 통해 경제적 약자들을 보호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높은 평등도를 유지하였다. 토지개혁을 통해 엄격한 농지소유 상한선을 도입하고 농·축산업에 대해 강력한 보호무역을 실시하여 소농(小農)을 보호하였다. 또 대규모 유통매장의 설립을 제한하여 소상인들이 살 틈을 만들어 주었다. 제조업에서도 일부 중소기업 고유업종을 지정하여 대기업의 경쟁으로부터 중소기업을 막아주었다.

 

그런데 이런 체제는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면 특이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후진국과 선진국 중에 예외적으로 미국은 원초적 자본주의 모델을 따르기 때문에 시장규제도 많이 하지 않고 세금과 복지를 통한 소득재분배도 별로 하지 않는다. 불평등도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여타 선진국들의 경우는 경제활동 자체에 대한 규제가 적어서 시장활동 자체에서는 거의 미국만큼 불평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들은 높은 세금과 복지지출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여 불평등을 줄여왔다.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다른 특이한 선택을 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냉전체제였다. 복지는 좌파정책이라는 냉전 이데올로기 때문에 복지국가를 채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공산국가들과 대치하는 입장에서 지나치게 높은 불평등을 용인하게 되면 체제경쟁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토지개혁, 진입규제, 보호무역 등을 통해서 경제적 약자들을 보호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규제완화와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규제를 통한 경제적 약자의 보호'라는 과거의 사회계약이 점차 파괴되고 있다. 그렇지만 과거 사회계약에 깔려있던 '공생(共生)'의 원리는 아직 남아 있기에 미국이나 브라질 등의 나라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높은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규제를 풀고 개방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책 변화가 있을 때마다 피해자들이 들고일어난다. 그리고 '통큰 치킨'의 예에서 보듯이 '여론 재판'에 지게 되면 합법적인 일인데도 기업들이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정책이나 외부환경에 변화가 생길 때마다 온 사회가 홍역을 치르지 않으려면 사회계약을 다시 써야 한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개방과 규제완화를 하되, 세금을 더 걷어서 복지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그 골자가 되어야 한다. 복지제도를 통해 국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하고, 실업수당을 지급하며, 노동자 재교육 제도를 강화하여서 변화의 과정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갈등사항을 '일괄타결'해야만 지나친 갈등 없이 개방과 규제완화를 추구할 수 있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